[김광일의 릴레이 인터뷰] 이광석 인크루트 사장

[김광일의 릴레이 인터뷰] 이광석 인크루트 사장

안녕하세요. 김광일의 릴레이인터뷰 코너입니다. 유비마케팅 김태윤 사장의 3전4기 사업이야기는 어떻게 보셨는지요.

무릇 비즈니스 세계에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무조건 성공한다는 자기체면속에 앞만 보고 달리는 승부근성을 가질때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일깨워준 인터뷰였습니다.

김태윤 사장이 바통을 넘긴 111번째 릴레이인터뷰 주인공은 국내 최초 온라인 채용 사이트인 인크루트의 이광석 사장입니다.

"국내 최초로 온라인채용사업을 시작한 인터넷 1세대 CEO입니다. 20대에 사업을 시작해 착실히 기반을 잡은 전형적인 벤처기업가입니다. 물론 경영능력도 검증된 유망 CEO입니다."

인크루트 이광석(33) 사장이 어떻게 20대에 창업해 성공할수 있었는지, 그의 인터넷 1세대 창업스토리를 소개합니다.

이광석 사장은 대학재학중 창업대열에 나선 청년 CEO다. 기술이나 특정 트렌드에 남보다 앞선 감각을 가진 20대 젊은이가 대학생 신분으로 창업, 온갖 시행착오와 시련을 거쳐 성공반열에 오른 입지전적인 벤처기업가의 모델 그자체다.

실제 이 사장은 서른셋이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을만큼 노련해보인다. 30대 초반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창업 8년차를 맞는 중고참 CEO다. 시장을 바라보는 시각과 경영감각은 얼추 사업 10년차를 훌쩍 넘긴 30대후반의 전문경영인처럼 보인다.

훤칠한 키에 막힘없는 언변이 눈길을 끈다. 그는 인터넷이란 말조차 생소하던 95년에 이미 인터넷에 입문, 인터넷의 위력을 누구보다 먼저 간파한 인터넷 1세대 대표주자다.

인터넷이 생활에 미칠 파괴력을 직감한 이광석은 학업을 중도 포기, 대학을 중퇴할만큼 인터넷에 미쳐 사업에 젊음을 쏟아부은 열정의 창업가다.

이 사장은 "경영능력은 나이순이 아님"을 증명이라도 하듯, 시장을 바라보는 감각과 경영수완은 벌써 노련하기 그지없다. 오랜 세월 겪은 시행착오덕분인지, 사람과 조직관리, 그리고 마케팅에 확실한 자신감을 갖고있다.

인크루트는 98년 설립된 국내 최초 온라인채용사이트. 현재 개인고객 270만명, 수만개 기업회원을 확보하고 있다. 지난해 뉴소프트기술과 합병, 온라인채용회사로서는 처음으로 기업공개에 성공했다. 올해 200억원의 매출을 낙관하고 있다.

◆ 23살의 도전, 국내 1호 디렉토리서비스

"제 자리 하나만 마련해주시면 인터넷카페 시스템관리를 해드리겠습니다.물론 손님들에게 인터넷이용법도 알려드리구요."

신촌 연세대 학교앞에 인터넷카페가 들어선다는 말을 우연히 들은 이광석은 그길로 수소문끝에 인터넷카페 사장을 찾아가 다짜고짜 사무실 '더부살이' 제안을 한다.

그는 개발중인 디렉토리서비스에 대해 설명한후 자신에게 인터넷카페 귀퉁이 한자리를 개발공간으로 사용할수 있게 해주면 인터넷카페 운영을 책임지겠다고 제안한 것.

이미 고교시절 인터넷에 눈을 뜬 이광석은 96년 8월,인터넷 디렉토리서비스를 개발하기 시작한다. 인터넷 초보자들이 손쉽게 정보를 검색할수 있도록 해주자는 생각에서 혼자 시작했다.

문제는 통신인프라. 느려 터진 모뎀환경에서는 개발을 할수 없었던 것. 대학원생이 아닌터라, 학교 시설은 그림의 떡이었다. 인터넷카페가 유일한 장소였다.

서버와 PC, 그리고 전용선, 네트워크망을 갖춘 인터넷카페는 이광석에게 최적의 개발공간이었다. 벤처란 말이 등장하기도 전인 96년, 이광석은 인터넷카페에서 벌써 창업준비를 하고 있었다.

94년, 미국에 유학중인 친구와 우연히 e메일을 주고받으며 인터넷을 처음 접한 이광석은 이후 인터넷에 흠뻑 빠져들기 시작한다. 대학생 이광석은 공부에는 별 관심이 없었고, 자나깨나 '인터넷'생각 뿐이었다.

인터넷이란 단어조차 생소하던 95년, 그는 국내 최초 인터넷동호회인 나우누리 인터넷스터디포럼(ISF) 시숍을 맡아, 인터넷보급에 앞장설만큼 앞선 인터넷전문가였다.

결국 입학 1년만에 휴학, 군에 입대한다. 공익근무요원으로 근무한 그는 오후 6시면 어김없이 신촌 인터넷카페로 출근, 밤새 개발에 매달렸다. 여기서 그는 7개월간 밤을 꼬박새며 개발에 매달린다. 매일매일 흥분에 사로잡힌 열정적인 시간이었다.

개발과 기획, 디자인, 프로그래밍 등 모든 걸 혼자했다. 모르는 건 늘 책보며 익힌후 해결했다. 1년간의 개발끝에 97년 3월, 드디어 국내 최초로 '한영'을 동시 검색할수 있는 검색엔진인 디렉토리서비스, 집(ZIP!)을 오픈했다.

집은 빠르게 움직인다는 뜻. 그 유명한 집(www.zip.org)은 이렇게 탄생했다. 놀라운 사실은 집서비스가 97년 9월 서비스를 개시한 야후코리아, 97년 11월에 오픈한 네이버보다 앞서 오픈했다는 사실이다.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어쩌면 지금의 네이버가 될뻔한 국내 최초 검색엔진 디렉토리서비스였던 것. 집은 오픈하자마자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등록신청만 하면 무조건 연결해주는 기존 포털과는 달리, 집은 전문 웹서퍼를 동원, 교육, 자연과학, 경제, 문화 등 분야별 전문사이트에서 제공되는 최고의 정보를 제공했다.

당시 주제별로 국내 1천200여 개 사이트들이 연결돼 있었다. 영어서비스가 가능, 미국에서도 한국의 사이트를 자유롭게 서핑할수 있도록 했다. 오픈한지 얼마되지 않아 웹검색사이트인 미 스타팅포인트의 컴퓨터분야 핫사이트로 선정될만큼 인기를 끌었다.

도서관분류체계를 갖다놓고 카테고리분류를 끝없이 수정, 재분류했다. 나중엔 10만개이상 사이트가 등록을 했고,하루 방문자수가 6만명에 이를 정도로 커졌다. 이광석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이광석, 그는 누구인가
74년 서울생. 연세대 천문우주학과 93학번(창업에 나서 중퇴) 나우누리 인터넷동호회 ISF 시숍출신. 97년 국내 최초 한영 디렉토리서비스 ZIP! 오픈. 96년, 23살의 나이에 인터넷사업에 뛰어든 국내 인터넷 1세대 CEO. 뛰어난 기획력과 개발, 마케팅력을 두루갖춘 전형적인 리베로형 스타일. 강한 추진력이 강점. 2000년 온라인채용 유료화를 단행, 닷컴기업들의 유료화를 주도했다는 게 벤처업계의 평. 2004년 중기청 '모범청년기업가상'수상.
취 미 독서,영화감상,운동, 골프
친한 IT맨 김경익 레떼컴 사장
감명깊게 읽은 책 카르마경영(이나모리 가즈오),인재(톰 피터스)
10년후 모습 모습 지금보다 더 많고 더 좋은 사람들과 같이 일하고 있을 것이다.


◆ 이해진(NHN 창업자)과의 숙명적 만남,이어진 처절한 좌절

"아저씨, 술드시고 여기 있으면 위험해요. 빨리 귀가하세요"

98년말, 디렉토리서비스를 네이버에 제공하던 직원 5명이 결국 네이버에 입사키로 한 날, 이광석은 몸도 가누지 못할 정도로 독주를 들이킨후 한강변으로 나선다.

하염없이 한강을 바라보던 이광석은 주체할수 없는 좌절감에 뜨거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고락을 같이했던 멤버들이 돈과 안정된 자리를 택하자 그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당시 NHN역시 직원이 5, 6명 수준이던 시절이었다.

이에 앞서 이광석은 한국정보통신산업협회로부터 사무실을 무상제공받는 행운을 얻는다. 그는 여기서 디렉토리서비스를 사업화할수 있는 기반을 마련한다.

동호회를 통해 웹서퍼를 확보, 'ZIP!인터넷연구회'를 결성, 카테고리 및 컨텐츠개발에 매달렸다. 미국 야휴를 벤치마킹, 14개 분류코드를 만들고, 생활에 밀접한 것들을 찾아, 검색엔진의 컨텐츠를 풍부하게 만들었다.

자원봉사로 활동한 이들 웹서퍼는 국내 최초의 웹서퍼들로, 이들은 이후 국내 유수 닷컴에서 웹서퍼 1세대로 이름을 날리게 된다. 당시 이광석은 사업화에는 관심이 없었고, 오로지 디렉토리서비스를 제대로 제공하자는 일념뿐이었다.

그가 드러낸 첫번째 한계였고, 이는 그에게 새로운 시련과 변화를 요구하는 중요한 단초가 된다. 결국 자금문제로 한계에 부딪혔다. 97년말, 이광석은 KT를 찾아가 KT의 검색엔진 '정보탐정'의 웹검색기술과 ‘ZIP!’의 디렉토리를 결합, 서비스하자고 제안한다. 하지만 반응이 없었다.

그런 와중에 삼성SDS 사내벤처팀에서 연락이 왔다. 네이버닷컴전신인 웹글라이더라는 사이트를 운영중인 이해진(NHN창업자)이었다. 공교롭게도 KT에 제안했던 내용과 똑 같은 것을 이해진 부사장이 제안해온 것.

놀라운 일이 아닐수 없었다.

만약 KT가 접목, 서비스를 했다면 지금의 포털시장판도가 어떻게 됐을까하는 의문을 갖게하는 대목이다. 흔쾌히 받아들였다.

하지만 문제가 생겼다. 서로 대등한 상태라, 누가 딱히 주도권을 잡기가 애매한 관계였던 것. 회사나 서비스규모가 서로 고만고만했기 때문.

결국 인터넷에 대한 비전과 이용자 지향적인 이해진 부사장의 설득으로 NHN 중심으로 결합, 서비스를 제공키로 합의했다. 비용을 받기로 하고 집(ZIP)을 제공했다.

고정적인 수입이 생겼지만, 여전히 사업에 대한 뜻은 전혀 없었다. 1년이 지난 98년 하반기, 문제가 터졌다. 네이버로 들어오는게 어떠냐는 제안이 들어온 것.

협력파트너사가 법인도 아니고, 실체가 없어 삼성SDS입장에서 계속 일하기가 마뜩지 않다는 설명이 곁들여졌다.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그렇게 되면 집의 실체가 없어질수 있기때문이었다.

결국 각자 자신의 길을 선택키로 결론을 내린다. 자원봉사자 비슷하게 일해온 터라, 결론은 뻔한 일. 5명 모두 삼성SDS 협력업체격인 네이버로 입사키로 결정한 것.

안정된 직장과 급여가 보장된 곳으로 옮기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하지만 그 것은 이광석에서 찾아든 첫번째 좌절이자, 시련이었다. 믿고 의지하던 동지들이 마치 돈때문에 떠난 것 같은 허탈감은 20대 중반의 이광석에겐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다.

늦가을 경찰의 도움으로 만취한 몸으로 겨우 귀가한 이광석은 이때부터 돈이 벌어야 한다는 사실과 함께 자본에 서서히 눈을 뜬다. 97년 9월, 야후코리아가 서비스를 오픈하면서 서비스개시 첫날 100만페이지뷰를 기록하는 것을 보고, 그는 큰 충격을 받는다.

야후코리아의 대성공을 보면서 이광석은 깊은 회한에 빠져든다.이보다 1년이상 먼저 서비스를 개시했지만, 비즈니스에 대한 개념이 전무했던 자신의 부족함에 안타까움만 한없이 삼킬수 밖에 없었다.

인터넷이 세상을 바꿀 것이며, 인터넷이 생활이 될 것이란 자신의 판단이 정확하게 맞아떨어지는 것을 보면서 이광석은 자신의 직관을 확신하며, 몇번이고 주먹을 불끈쥐었다. 이미 값비싼 수험료를 치렀다는 사실을 그는 이미 느끼고 있었다.

◆ 창업, 그 우연한 도전

"광석아, IMF이후 가장 큰 관심사가 뭔지 알아? 바로 일자리문제야. 취업정보를 제공하는 서비스를 만들면 어떨까? 이거 개발, 가능하지?”

이광석은 98년 3월초, 모 경제연구소 연구원으로 일하던 친구 서미영(현 인크루트 공동창업자겸 이사)으로부터 한통의 전화를 받곤 무릎을 친다.

딱 떨어지는 아이템이었다. IMF직후라 타이밍도 딱맞았다. 인터넷과 취업은 앞으로 끝없는 화두일 것으로 판단, 사업성을 확신했다.

"일과 사람을 연결하는 시스템만 만들면 무조건 성공할거라는 판단이 들었습니다."

이미 디렉토리서비스를 하면서 DB설계, 관리 노하우를 터득해놓은터라 개발은 식은죽 먹기였다. 이미 한번의 실패의 아픔을 겪은 이광석은 철저히 수익모델부터 기획했다. 결국 중계모델사업으로 아이템을 좁히고, 리크루팅쪽으로 사업방향을 정했다.

국내 최초 온라인채용시스템 인크루트는 이렇게 탄생한다. 3개월후인 98년 6월,구인구직사이트를 오픈, 서비스를 개시했다. 국내 최초로 이력서를 쓸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었다. 조건별로 입력하고, 검색할수 있는 구인구직시스템이었다.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시스템이었다.

당시만해도 개인의 경우, 어떤 기업이 채용계획을 갖고있는지, 파악할 방법이 없었다. 기업들 역시 스스로 인터넷에 채용정보를 올릴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6명이서 시작했다.

기업과 네티즌들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이력서를 온라인으로 무료로 받아볼수 있다는 사실에 업체들은 신기해했다. 연말에 무려 4천여 개 업체가 등록을 했다. 99년 4월, 자본금 5천만원으로 법인을 설립, 본격적으로 사업을 펼치기 시작했다.

배너광고와 초기화면에 '핫잡'이란 코너에 기업명을 올려주는 서비스를 유료로 제공했다. 매출은 그럭저럭 사무실을 꾸려갈수 있는 정도는 됐다.

국내 최초로 등장한 온라인채용사이트 인크루트의 인기몰이는 예견된 일이었다. 개인이용자는 2년여만에 40만명을 돌파했고, 기업역시 2만개사를 넘어섰다.

서울이동통신과 제휴, 개인들에게 무료로 채용정보를 뿌려주는 SMS서비스도 제공했다. 99년, 한솔텔레콤으로부터 6억원의 투자로 유치했다.

TV광고를 시작하며 공격적인 경영에 나섰다. 벤처캐피탈에서 투자에 적극적이었다. 곧 수십억원의 자금이 수혈될수 있을만큼 국내 첫 온라인채용업체인 인크루트에 대한 VC들의 관심은 지대했다.

하지만 손끝에 막 잡힌 것같은 달콤한 성공의 느낌은 오래가지 않았다. 2000년 5월, 닷컴거품이 빠지면서 벤처산업에 혹한이 불어닥친 것.

당시 이 사장은 디렉토리 사업의 첫번째 실패경험과 온라인채용사업 초창기 소극적인 마케팅탓에 경쟁사가 생겨난 점을 의식, 마케팅에 엄청난 돈을 쏟아붓고 있었다.

곧 15억원규모의 자금이 유치될 것으로 확신, TV광고 등 자금력 이상으로 돈을 쏟아붓고 있었던 것. 금방이라도 투자할 것같았던 VC의 투자약속은 닷컴거품이 빠지면서 물거품이 됐다.

곧바로 TV광고를 중단했지만 자금은 이미 바닥난 상태였다. 직원수는 40명을 훌쩍 넘어설만큼 회사규모는 커져있었다. 운영자금을 구해야하는 절박함 ,그 와중에 지분 51%를 46억원에 인수하겠다는 I사의 달콤한 합병제안 유혹. 진퇴양난의 상황이었다.

바닥난 자금, 사무실이전 보증금, 인건비 등 운영자금에 허덕이던 그로써는 45억원은 떨쳐버리기 힘든 거액이었다. 하지만 어린 이광석은 합병제안을 거절한다.

이유는 인수합병되면 인크루트 사업이 그냥 묻혀 유명무실해질 것같은 불안감 때문이었다. 결과적으로, 놀라운 결단이 아닐수 없다. 이광석의 승부사적 기질은 이때부터 서서히 발휘되기 시작한다.

그는 몇차례의 시련기를 거치면서 사업가로써 역량과 숨어있던 잠재력을 하나둘 일깨우고 있었다. 벼랑끝에 몰린 그가 선택한 것은 '유료화'.

2000년 당시만해도 닷컴에게 유료화는 그야말로 '고양이목에 방울달기' 격이었다. 인터넷하면 무료라는 등식이 상식처럼 여겨졌고, 인터넷 유료화를 시도하는 기업은 매도당하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그는 과감히 유료화로 승부수를 던졌다. 더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바닥난 자금을 메울 방도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인크루트, 어떤 회사인가
설립일 1998년
종업원 150명
연락처 1588-6577 www.incruit.com
사업영역 - 취업·인사 포털 서비스 인크루트 (www.incruit.com) - 아르바이트 정보서비스 알바팅 (www.albating.com) - 연봉통계 정보서비스 오픈샐러리 (www.opensalary.com) - Career Netwoking 서비스 누구 (www.nugu.com) - 확장형 ERP 전문 서비스 NST (www.nst.co.kr) - 100% 웹기반 ERP 서비스 B2BERP (www.b2berp.co.kr)
경영목표 토탈 HR 글로벌스탠다드 미디어그룹으로 발돋음
매출목표 200억원(2006년기준)


◆ 이광석의 질주본능

"흑자가 9억원이란 말이야? 다음보다 흑자규모가 크네?"

2001년말, 오랜만에 대학후배 이광석사장 사무실을 찾은 이재웅 다음커뮤니케이션즈 사장은 인크루트의 흑자규모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것도 인터넷서비스를 제공하면서 감히 유료화를 단행, 단번에 흑자기조를 달성한 매출구조를 살피며 연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 사장이 유료화를 단행한 시점은 2000년 12월. 수없는 난상토론과 고민끝에 내린 결론이었다. 당시 회원규모는 개인이 40만명, 기업이 2만개사 정도였던 상황. 동시지원가능한 회사는 무려 10만건에 이를만큼 기업회원수도 급증했다.

개인은 무료, 기업회원에 한해 과금하는 기업유료화를 고집했다. 여기저기서 우려의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하지만 이 사장은 유료화의 성공을 확신했다.

"온라인채용은 기업입장에서는 꼭 필요한 서비스라고 확신했습니다. 유료화는 어차피 가야할 길이었고, 다만 조금 일찍 간다고 생각했습니다."

주위의 만류와 걱정에도 불구하고 유료화는 대성공을 거둔다.

유료화를 단행한지 한달만인 2001년 1월, 곧바로 3천만원의 흑자를 기록한데 이어, 2월에는 4천만원, 3월에는 5천만원의 흑자를 기록하는 등 순익이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주위의 예상을 깨고 유료화에 성공한 인크루트는 이후 매년 300%이상의 고속성장세를 이어가며, 닷컴의 성공모델로 확실하게 자리매김을 하기 시작했다.

극심한 자금난과 투자유치실패는 전화위복이 됐다. 살아남기 위해 유료화를 단행했던 인크루트 경영진은 탄탄한 흑자기조를 이룬이후 밀려드는 벤처캐피탈들의 투자제안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야말로 반전드라마 그 자체였다.

2002년 4개 기관으로부터 25억원의 투자를 유치, 더욱더 공격적인 경영을 펼친다. 이 사장은 2004년말 또한번의 승부수를 던진다.

유료로 채용정보를 올리는 것을 모두 무료로 풀어버린 것. 대신 선택적인 부가서비스로 과금하는 부분 유료화로 전환했다. 이를테면 게재위치나 게재방식에 따라 요금을 차등부과하는 방식을 택한 것. 트래픽과 수익성 모두를 높이기위한 전략이었다.

아울러 은행, 공기업 등이 신입사원공채시 필요한 입사서류시스템, 채용시스템 등을 온라인으로 저렴하게 제공하는 채용시스템 ASP사업에 본격 착수했다. 대기업 및 외국계기업을 대상으로 하는 채용컨설팅 및 필기시험, 면접, 적성검사등 인사관리시스템업무 대행사업에도 뛰어들었다.

인크루트는 2005년 3월 뉴소프트기술과 합병, 상장기업으로 변신하는 등 온라인채용사이트로는 최초로 기업공개에 성공했다. 유료화이후 흑자기조를 달성한 인크루트는 매년 매출이 수직상승, 2003년에는 103억원의 매출을 달성했다. 이어 지난해는 125억원,올해는 200억원을 자신하고 있다.

주력사업인 HR사업, ERP사업에 이어 올해 아르바이트, 인사교육, 공공취업지원, 지역사업 등을 공격적으로 추진할 계획이다. 글로벌서비스도 이 사장이 신경쓰는 대목. 2005년 세계 최고수준의 인사컨설팅회사인 미 헤이그룹과 제휴한 데이어 미국 최대 구직사이트인 커리어빌더와도 제휴,글로벌 HR서비스를 강화해나가고 있다.

◆ 이광석의 성공론

이광석 사장의 성공론의 첫번째는 온라인채용회사 CEO답게 역시 사람이란다.

"결국 사람이 핵심입니다. 열정과 아이디어가 넘치는 사람과 같이 일해야 성공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직원과 경영진과의 파트너쉽을 중요한 요소로 지적한다.구성원들이 자발적인 참여를 가능케하는 오너쉽을 가지지 않고는 벤처기업은 살아남을수 없고, 그런 자발적인 참여를 가능케하는 파트너쉽을 구축하는게 중요하다고 분석한다.

"그것이 성과에 대한 보상이건, 스톡옵션이건, 모든 직원들이 오너쉽을 가지고, 자기의 일처럼 회사일을 할때만이 성공할수 있습니다."

그가 제시하는 성공론의 두번째 키워드는 미래 예측력.

"기본적으로 시장에 기반한 예측을 할수 있어야 합니다. 시장과 수요를 예측하지 못하고서는 살아남을수 없습니다. 물론 정답은 없죠. 수많은 시행착오와 고민을 통해 찾아야 합니다."

세번째는 열정이란다. 자발적 열정이 있어야만 성공할수 있단다.

"늘 겸손하고, 사그라들지 않는 자발적인 열정을 쏟아내야 합니다. 이를 통해서만 끝없이 이어지는 시련과 좌절을 딛고 일어설수 있습니다."

채용전문회사 CEO가 제시하는 ‘좋은 회사 입사하는 방법’과 ‘뛰어난 인재 채용하는 방법’은 과연 무엇일까?

이 사장은 직원들에게 늘 맡은 분야의 최고전문가가 되라고 주문한다.

"일을 개선하려고하는 열정이 없는 사람은 조직에 폐해를 주게 됩니다."

그는 사람이 모일수 있는 회사가 되기를 희망한단다. CEO가 비전을 제시하는 것도 좋지만, 훌륭한 사람들이 모이면 스스로 비전을 만들어내고, 오너쉽을 가지고 부가가치를 만들어낸다는 게 그의 지론.

인크루트 이광석 사장은 서른세살이 믿기지 않을만큼 탄탄한 성장기반을 확보하고 있는 국내 온라인채용업체의 개척자였다. 젊은 벤처기업가 이광석 사장의 글로벌비즈니스가 또다시 어떻게 펼쳐질지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인터뷰를 마치며]

이광석 사장은 개인적으로 자신의 옆자리를 내줄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희망한다고 합니다. 자신의 옆자리를 과감히 내줄수 있는 사람, 또 그렇게 과감히 자신의 옆자리를 내줄수 있는 그런 사람이 주위에 있는게 참으로 큰 행운이라고 생각한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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