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티랩 - 정보산업 원로 좌담회 "한국, 40년전 컴퓨팅 강국 될 수 있었다"

[지디넷코리아]

1960년대 초반 만해도 우리나라 1인당 국민소득은 80달러였다. 세계 최빈국 수준이였다. 국민총생산(GDP)도 마찬가지다. 당시 우리나라 국민 3500만 명이 1년간 벌어들인 GDP가 30억 달러였다. 3500만명이 벌어들인 금액이 직원 10만 명인 미국 IBM 한개 회사 연간 매출보다 작았다. 이후 50년이 지났다. 지금 우리는 1인당 국민소득 3만 달러를 몇 년전 넘었고, GDP도 1조 5512억 달러로 세계 10위다.

민관이 지난 50년간 혼연일체로 부국강병에 힘을 기울인 결과다. 특히 우리나라 경제의 30% 정도를 차지하는 정보통신(ICT) 역할이 컸다. 이에 우리 정부도 지난 4월 21일 열린 ‘2021년 과학·정보통신의 날 기념식’에서 'ICT 강국 코리아'에 크게 기여한 원로 7명에게 특별 공로상을 수여했다. ICT 원로들이 정부에서 특별 공로상을 받은 건 이번이 처음이다.

지디넷코리아는 한국정보산업연합회(정산연)와 함께 틀별공로상을 받은 7명 원로중 정보산업(컴퓨팅)과 관련이 있는 네 분의 원로를 초청, 대한민국 정보산업이 어떻게 태동했으며, 어디로 나가야할 지를 듣는 특별좌담회를 개최했다. 네 분의 원로는 이용태 전 삼보컴퓨터 회장, 이주용 KCC정보통신 회장, 김영태 전 LG CNS 사장, 이강태 한국CIO포럼 명예회장(전 비씨카드 대표) 등이다.

이용태 전 삼보컴퓨터 회장은 국내서 처음으로 개인용 컴퓨터(PC)를 상용화한 삼보컴퓨터 설립자다. 초고속 인터넷망 기업인 두루넷도 만들었다. 1982년 국내 첫 개인용 애플2 컴퓨터 호환기종 PC인 '트라이젬 20'을 개발했고 문서 작성 소프트웨어 보석글도 발표(1995년)했다. 현재 박약회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주용 KCC정보통신 회장은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컴퓨터를 도입(1967년)한 주인공이다. IBM 1호 한국인 직원이기도 하다. 어린이, 청소년 대상 무료 소프트웨어교육과 각계·각층에 다양한 기부활동을 실천하고 있다.

김영태 전 LG CNS 사장은 우리나라 시스템통합(SI)기업이 처음으로 글로벌 정보 기업과 합작한 LG EDS 초대 대표다. 컴맹이였던 그는 우리나라 시스템 통합 산업의 기반을 다지는데 큰 역할을 했다.

이강태 전 비씨카드 대표는 국내 최대 IT협의체인 ‘한국CIO포럼’ 명예회장으로 산업계 정보화 확산 및 IT 산업 발전에 기여했다. 특히 LG유통 POS개발과 삼성테스크 ERP프로젝트로 국내 최초 리텍 패키지를 도입했다.

특별 좌담회는 지난 15일 서울 중구 서울클럽 지리산룸에서 'IT산업 원로들에게 듣는다’를 주제로 열렸다. 사회는 한국정보산업연합회 산하 국내 최대 CIO모임인 한국CIO포럼 간사로 활동하고 있는 오재인 단국대 교수가 맡았다. 정진섭 한국정보산업연합회 회장과 김경묵 지디넷코리아 대표가 자리를 함께해 원로들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특별 좌담회에 참석한 원로들. 앞줄 왼쪽부터 이강태 한국CIO포럼 명예회장, 이용태 전 삼보컴퓨터 회장, 이주용 KCC 회장, 김영태 전 LG EDS 초대 대표.

정보산업 원로들은 대부분 컴맹에서 우연히 컴퓨터를 접하고 '새로운 세계'를 맛봤다. 이후 '새로운 세계'를 열어가는 주인공들이 됐다. 원로들은 벌써 아흔을 바라보는 나이가 됐다. (우리나라 나이로 이용태 회장이 89세, 김영태 사장이 88세, 이주용 회장이 87세다. 이강태 회장은 69세다). 지난 수십년간 "정보혁명의 씨앗이 되겠다"는 심정으로 일해 온 원로들은 좌담회에서 "우리나라 젊은이들은 탁월한 역량을 갖고 있다. 규제를 완화하고 기성세대와 정부가 잘 밀어주면 또 하나의 신화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을 나타냈다.

특히 원로들은 한 목소리로 디지털트랜스포메이션 시대에는 인공지능과 임베디드 소프트웨어가 핵심이 될 것이라며, 정부가 의지를 가지고 인공지능과 임베디드 소프트웨어를 결합시키는 분야에 적극 투자하고 육성해야한다면서 "민관이 힘을 합쳐 다시 한 번 ICT 강국 신화를 달성하자"고 후배들에게 당부했다. 아래는 좌담회 내용이다. 아쉽게 이주용 KCC 회장은 좌담회 날 갑자기 몸 상태가 안좋아져 다른 원로들과 간단히 인사만하고 자리를 뜬 후 서면으로 내용을 전해왔다.


=사회(오재인 단국대 교수): 정부가 원로들에게 특별공로상을 준 건 이번이 처음이라고 한다. 다시 한 번 수상을 축하한다. 몸도 불편하고 공사다망한데 일부러 우리나라 정보 산업계와 후배들을 위해 좋은 말씀해주기 위해 참석해줘 고맙다. 먼저 특별 공로상을 받은 소감을 듣고 싶다. 근황도 함께 알려 달라.

=이용태(전 삼보컴퓨터 회장): 업계에서 물러나 이젠 잊혀진 사람으로 알고 있었는데 상을 받았다. 완전히 잊혀진 건 아니구나하고 생각했다. 고마울 뿐이다.

=이주용(KCC정보통신 회장): 본격적인 경영일선에서 물러난 게 1993년이다. 벌써 28년이 지났다. 큰아들과 작은 아들이 KCC정보통신과 시스원을 각각 잘 운영하고 있어 다행으로 생각한다. 지난 2017년 허리 협착 수술을 받은 이후 건강이 악화돼 이후 재활운동을 하면서 종하장학재단과 '미래와소프트웨어 재단' 관계 일에만 관여하고 있다.

=김영태(전 LG CNS 사장): 이 분야는 여기 계신 이용태 회장이 대선배다. 원래 나는 이 분야 문외한 이였다. 어쩌다 빠져들게 됐다. 이렇게 공로상을 받게 돼 매우 감사하다. 한 가지 아쉬운 건 시상식 날 가보니 축제 분위기가 안 나더라. 방송과 신문 등 언론 보도도 거의 없었다. 정보통신과 과학이 매우 중요하지 않나. 코로나19 때문이겠지만 다음에는 축제 분위기가 물씬 나는 행사로 진행했으면 좋겠다.

=이강태(한국CIO포럼 명예회장): 다른 원로에 비하면 나이가 한참 어리다. 원로 소리 듣는 게 뒷방으로 나가라고 하는 건지, 또 원로 기준이 뭔지, 내가 자격이 있는지 등 여러 가지로 불편한 자리다.(웃음). 나도 수상에 감사할 따름이다.

=사회: 영어에 그랜드파더링(Grandfathering)이라는 말이 있다. 적절한 말이 없는데, 전관예우 정도 될까. 그랜드파더링이 있다는 말은 미국은 이걸 제도화했다는 거다. 우리는 이게 없는데, 이제라도 원로들을 기리는 문화가 정착했으면 좋겠다. 원로들이 어떻게 컴퓨터와 인연을 맺게 됐는지 궁금하다.

=이주용: 컴퓨터와의 만남은 우연이었다. 1955년 서울대 2학년 재학 중 운이 좋게 미국에 가 미시건대에서 경제학을 공부하면서 접시닦이, 잔디깍이 등 여러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고학으로 1958년 미시건대학을 졸업했다.

이주용 KCC 회장

졸업 후 학과장 배려로 미시건대학교 사회과학연구소에서 컴퓨터 오퍼레이터로 일했다. 이 연구소에 있던 컴퓨터가 바로 IBM의 첫 컴퓨터 기종인 IBM650이었다. 이것이 내가 정보산업에 첫 발을 딛게 한 시발점이다. 이후 대학원을 마치고 1960년 미국 IBM에 최초의 한국인 프로그래머로 입사했다.

=김영태: 럭키화학(지금은 LG화학)에 근무할 때다. 심사 과장을 맡아 여러 일을 했는데 계수(숫자)를 잘해야 하는 일이 생겼다. 그래서 컴퓨터를 들어와야겠다고 생각했다. 럭키화학과 금성사 두 회사가 공동으로 IBM360이라는 컴퓨터를 들여왔다. 쓸 사람이 우리 부서 밖에 없었다. 그래서 정보처리에 참여하게 됐다. 이게 인연이 돼 1986년에 그룹 전체에 전산실을 통합하는 업무와 미국 EDS와 합작하는 업무도 맡았다. 합작사 사장으로 9년간 일했다. 이번에 상을 받은 것도 이게 역할을 했다고 들었다. 그만 둔지 25년인데 상을 받아 기쁘고 한편으로 놀랐다. 오래전에 한 일을 다시 되새겨 인정해주니 영광이다.

=이용태: 1969년 말 미국에서 돌아와 1970년부터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전산실에서 근무했다. 당시 KIST 전산실에는 컨트롤데이터컴퓨터(CDC)3600이라는 한국에서 유일하게 제대로 된 컴퓨터가 있었다. KIST 전산실 목적은 연구개발과 연구개발 기술 지원, 행정 지원 등 세 가지였다. 특히 컴퓨터 도입 목적은 KIST 연구원들이 연구하는데 편의를 제공하는 것이다. 하지만 KIST 전산실을 맡은 성기수 박사는 생각이 전혀 달랐다. KIST 내부를 도와주기보다 한국에 전산서비스할 생각이 컸다. 1970년은 컴퓨터 역사에서 의미가 큰 해다. 이 해에 미국 인텔이 처음으로 CPU칩과 메모리칩을 만들었다.

이용태 전 삼보컴퓨터 회장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주겠다. 인텔이 CPU 칩과 메모리칩을 만든 건 일본 기업이 요청을 해서다. 일본의 탁상 타이프라이트를 만드는 회사가 있는데, 이 회사 제품 모델이 여러 개인데 모델마다 전자회로를 따로 설계하는게 힘들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인텔에 돈을 주고 만들어달라고 해 나온게 프로세스 칩이고 다음에 메모리칩도 나왔다. 지금 보면 역사적 대사건이다. 하지만 당시는 NEC나 제너럴일렉트릭(GE)같은 대형 전자회사들이 그 중요성을 몰랐다. 나는 우연히 이걸 보고 "왔다"라고 생각했다. IC칩으로 컴퓨터를 만들면 한국이 세계적인 컴퓨터 메이커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는지 나도 모르겠다. 이후 KIST와 정부를 설득하러 다녔다. 100명의 엔지니어를 3년만 달라고 했다. 그러면 세계 최고 마이크로컴퓨터를 만들겠다고 했다. 하지만 공무원들이 돈키호테 바라보듯 시큰둥했다. 당시만 해도 애플도, 마이크로소프트(마이크로소프트)도 없던 시절이다. 아무리 얘기해도 정부와 KIST가 반응을 안하니 사표를 내고 나가려 했다. 그런데 KIST 소장과 부소장이 "너 없으면 안된다"고 붙잡아 결국 1987년까지 있었다. 정부와 KIST가 내 얘기를 무시한 반면 OB맥주 정수창 사장은 관심이 있어 했다. 3년간 100명을 줄테니 "대신 그 사람들은 OB맥주 사원신분이어야 한다"고 했다. KIST는 인력을 KIST소속이어야 한다고 고집했고, 양자간 이견이 커 결국 그 일이 성사되지 못 했다.

=이강태: 그런 일화가 있는 지 몰랐다. 내가 컴퓨터와 인연을 맺은 건 1979년 LG그룹에 입사하면서다. 내가 신입사원일 때 김영태 회장님은 당시 회장 비서실 전무였다. 까마득한 후배였다. 당시는 직장인들이 주말도 없이 일했다. 저녁 12시 이후로 못 다니는 통금이 있을 때고, 통금 전에 택시타고 집에 가곤 했다. 사적인 애기지만 아들이 5살까지 어떻게 컸는지 모른다. 아이가 잘 때 들어가고 새벽에 일찍 나왔으니 그랬다. 이렇게 힘들게 살다 회사에 PC 한대가 들어왔는데 아무도 안쳐다봤다. 당시 계수 맞추는 일을 했는데 내가 상고 출신도 아니고, 너무 고생을 했다. 그러다 1982년 후반에 로터스 프로그램을 써 봤는데 너무 편했다. 계수 숫자 바꾸는데 기존에 7~8시간 걸리던 일을 3분이면 끝냈다. "아, 컴퓨터는 나를 구원해 주는 기계구나"라고 생각했다. 네덜란드에 장학금 받고 6개월 유학 갔는데, 거기서 한국이 일하는 방식이 후진적이고, 몸으로 떼우는 일을 하고 있구나 하는 걸 알게 됐다. 그래서 한국IBM으로 옮겼고 여기서 본격적으로 컴퓨터 교육을 받았다. 이게 내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됐다."

=사회: 이용태 회장님에게 묻겠다. 세계은행이 우리나라에 컴퓨터와 반도체 공장을 지으라고 컨설팅 해준 게 지금의 ETRI 설립과 연관이 있다고 하던데...

=이용태: 1977년 제3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시작됐을때다. 이를 위한 팀이 여러개 있었는데 나는 그때 전자공업부팀에서 일했다. 당시 정부가 세계은행에 의뢰해 전자공업팀이 한 단계 도약하는 프로그램을 만들게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그래서 세계은행이 컨설턴트를 파견해 반도체와 컴퓨터를 파일럿(시험) 생산하는 공장을 만들라고 하며 이를 도와주겠다고 했다. 이 프로젝트가 한국전자기술연구소(후에 ETRI가 됨) 설립 발단이 됐다. 1977년 만들어졌는데 발족할 때 KIST에 있는 반도체 센터가 나가 전자기술연구소의 반도체 부문이 됐다. 또 당시 내가 실장이었던 KIST의 전자계산기 국산화연구실이 나가 전자기술연구소의 컴퓨터 분야를 맡았고, 내가 부소장을 맡았다. 당시 세계은행이 기기 사는 돈을 대줬을 뿐 아니라 우리 직원이 미국서 훈련 받는 비용과 미국 컨설팅 비용도 대줬다. 목적은 구미에 세계최고 반도체 및 컴퓨터 파일럿 공장을 세워 금성(LG)과 삼성이 와서 만들어보고 좋으면 너희 회사 가서 만들라는 거였다. 굉장히 좋은 지원이었다. 그런데 한국 정부는 형식적이였다. 세계은행이 하라고 하니 마지못해 하는 척 했다. 내가 당시 기재부 국장한테 "세계은행이 기계를 사 줬는데 기계를 놓을 건물도 안주고 사람 부르는 돈도 안준다. 콩고 정부보다 못하다"고 했는데 공무원들은 다른 말은 다 잊고 콩고 운운하며 오히려 나를 욕했다. 또 당시 세계은행 담당자가 과장인데 과장이 국장한테 대든다는 등 이런 말만 했다. 그러다 박 대통령 시해 사건이 나고 국보위가 생겼다. 그래서 나도 전자기술연구소를 그만두고 나올 수 있게 됐다. 나올 때 벤처캐피털 자금 모아서 정보산업 관련기업 100개를 만들겠다고 했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 아쉽다. 애플과 MS가 나오기 전인 일어난 일인데, 그때 공무원들이 협조하지 않아 좋은 세월이 다 지나가버렸다."

=사회: 이용태 회장님 회고처럼 정보산업 태동기에 우리나라 환경이 척박했다. 더 좋은데 몸 담을 수 있었을 텐데 원로들은 어떻게 정보산업분야 몸을 담게 됐나

=이주용: 1955년 도미 유학한 후 1963년 8년 만에 귀국해 한국에 IBM대표사무소를 열고 대표를 맡았다. 한국IBM 대표로 2년 근무한 후 다시 미국IBM 본사로 발령을 받았다. 이후 1967년 한국 최초의 컴퓨터(FACOM222)를 미국에서 도입해 한국전자계산소(지금의 KCC정보통신의 모태)를 설립할 때 미국 IBM을 퇴사하고 한국으로 돌아오는 '모험'을 했다. 만약 내가 고액 연봉만 생각했으면 IBM에 그냥 남았겠지만, 그때는 정보화를 통한 한국 산업 근대화에 미력하나마 일조를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귀국했다. 아직도 그 선택에 전혀 후회가 없다.

=김영태: 앞에서 잠깐 말했지만, 원래 금성사로 시험을 쳐 들어갔다. 수출을 담당했다. 오퍼 등 혼자서 업무를 다 했다. 그러자니 죽을 지경이었다. 2년 반 되니 럭키로 가라고 해 거기에서 구매를 맡았다. 전 세계 원료를 구매하는 업무였다. 럭키서 3년이 지나니 이번엔 계수 관리를 하라고 했다. 재무관리를 분석해 경영에 도움이 되게 하는 거다. 이것도 엄청나게 힘들었다. 계수가 정확히 파악이 안되던 시절이다. 당시 P 사장이 "그룹이 이러면 안된다. 기계를 사 오자"고 했다. 그게 뭔지 몰랐다. 나중에 보니 메인프레임의 제일 작은 기종이였다. 그런데 실무적으로 어떻게 쓰는지 아무도 몰랐다. 회사에서 나를 실무로 찍었다. 당시 나는 컴퓨터도, 전자정보처리시스템(EDPS)도 몰랐다. 교육을 받아도 잘 모르겠고, 당시 시스템공학연구소(SERI)의 성기수 박사한테 가서 물어도 잘 모르겠다 하고, 엄두를 못내다 사장한테 보고했다.

김영태 전 LG EDS 초대 대표

우리보다 먼저 사용한 일본 기업에 가 배우고 오겠다고. 녹음기 하나 들고 나 혼자 일본에 갔다. 두달간 10개 일본 회사를 찾아가 배웠다. 회사 공식 의뢰가 있어 친절히 가르쳐줬다. 일본 기업 경험담과 입출력 양식을 얻어 한국에 와 종이를 전부 붙였다. 직원들도 처음 하는 일이라 다들 힘들어해 했다. 당시는 코볼과 어셈블리어를 쓰던 시절인데, 뭘 어떻게 해야 시스템이 되는지 다들 몰랐다. 한쪽에서는 PC면 되는데 뭐하러 메인프레임 쓰는냐는 말도 했다. 미국 유학 갔다 온 박사들이 이런 말을 했다. 일본에서 배워 불과 6개월 만에 결과를 냈다. 영업먼저 손댔다. 판매하는 제품과 거래처가 많고 가격 종류도 천차만별인데 이걸 계수화해 분석해줬다. 사장과 임원, 부장과 과장들 모두가 "이런거 본 적이 없다"며 다들 좋아했다. 이걸로 밖에서 강의도 했다. 86년까지 여러 LG 그룹을 옮겨 다녔다. 그룹사마다 다른 형태 전산시스템을 갖고 있었는데, 그러다보니 그룹에서 머리 아파했다. 이걸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하던 참에 미국 EDS가 우리와 미팅을 원했다."

=사회: 원로들 추억담을 들으니 그대로 우리나라 컴퓨터 역사다. 원로들은 우리나라가 IT후진국에서 글로벌 선진국이 된 동력이 뭐라고 보는지 궁금하다.

=이주용: 우리나라는 땅도 작고 자원도 부족하지만 사람은 많고 특히 교육열이 뛰어났기에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특히 IT분야는 하드웨어보다 소프트웨어가 중요하기에 인적자원이 대부분을 좌우한다. 그 동안 한국은 컴퓨터, 핸드폰, 반도체 등 하드웨어 분야에서는 눈부신 발전을 보였지만 소프트웨어 분야는 아직 선진국에 비해 많이 뒤떨어져 평소 아쉬움을 갖고 있다. 내가 운 좋게 3차 산업혁명인 정보화 혁명시기에 컴퓨터를 처음 접하고 사업을 통해 재산을 모았지만 내 재산의 절반이라도 평소 아쉬웠던 한국 소프트웨어산업 발전을 위해 내놓아야겠다는 생각을 2017년 창립 50주년 행사 무렵 가졌다. 이제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우리나라가 계속 앞서나가기 위해서는 소프트웨어 발전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를 위해 재단법인 '미래와 소프트웨어'에 약 100억 원을 이미 출연해 코드클럽코리아 등을 통해 미래소프트웨어인재양성 교육을 적극 지원하고 있다. 또 서울대학교 인문대에 ‘정보문화학 기금교수’를 위한 학교발전기금에도 10억 원을 기부했다. 앞으로 ‘미래와 소프트웨어 재단’을 더욱 키워 국내외 소프트웨어산업의 건전한 육성과 발전을 도모할 계획이다. 우수한 선진기술개발과

소프트웨어인재 양성을 위해서도 많은 노력을 기울이겠다."

=김영태: 여러 그룹사를 다니다 금성사 부사장으로 갔다. 그때 그룹에서 야단이 났다. 컴퓨터를 그룹사마다 각자 들여왔는데 서로 연결이 안됐기 때문이다. 내가 있던 금성사 시스템도 점검해보니 별로 도움이 안되는 시스템이더라. 그룹이 이런 고민을 하고 있을 때 미국 EDS가 우리한테 만남을 요청했다. 당시 김 모 박사가 정부 등을 다니며 대한민국 정부의 모든 정보처리를 EDS에 맡기라 했다. 김 박사가 우리한테도 왔다. 마침 우리는 통합에 대한 니즈가 있었다. 그룹에서 팀을 새로 만들어 13명을 배정했고 나보고 맡으라 했다. 책임감이 생겼다. 먼저 우리가 세계적으로 어떤 수준에 있는 지 파악에 나섰다. 미국 EDS 본거지의 데이터센터를 둘러봤고, 일본의 잘하는 몇 곳도 방문했다. 한국과 미국, 일본 현장을 방문하며 느낀 건 우리나라 수준이 미국과는 20년, 일본과는 10년 뒤져있다는 것이었다. 이걸 어떻게 일거에 추월할까를 고민했다."

=사회: LG EDS는 국내 시스템 통합기업과 글로벌 시스템 통합기업간 첫 합작사다. 문화 등이 달라 합작이 쉽지 않았을 것 같다.

=김영태: 당시 EDS는 세계적으로 데이터 프로세싱과 시스템 통합(SI)에서 세계 최고였다. 그래서 합작을 하게 됐는데, 합작 계약이 쉽지 않았다. 나는 10년간 계약과 5년 단위 연장을 하자고 했다. 결혼하면 해로할 생각을 해야지 이혼할 생각을 한다는 말이 돌아왔다. 기술 문제도 있었다. 미국 EDS에 가보니 메인프레임을 센터에 두고 워크스테이션으로 연결했더라. 이는 새 조류랑 안 맞았다. 또 하나는 문화였다. EDS는 여러 회사 일을 공유 하는 사고방식인데, 이게 한국에서는 안 맞는다. 기술, 문화 등 여러 골치 아픈 문제가 많았다. 또 EDS는 IBM 위주로 하자고 했는데 우리 그룹은 히타치랑 사이가 좋았다. 결국 둘 다 사용했다. IBM도 알고 히타치도 아니 나중에는 이게 오히려 더 좋았다. 처음에 합작사 이름은 STM(시스템 테크놀로지 매니지먼트)이였다. STM은 처음부터 영어 이메일을 사용했다. 직원들을 한데 모으기 위해서였다. STM 직원 근무지는 원래 있는 회사 그대로였기에 한데 모을 재간이 없었다.

김영태 전 LG EDS 초대 대표.

그래서 영어 이메일로 하나가 되려 했다. 당사 한글 이메일은 없었다. 사장부터 영어 이메일을 쓰고, 출장품의도 이메일로 했다. 미국 사람 수십 명이 들어와 같이 일하다보니 언어 장벽이 있었다. 같은 말을 해도 이해를 달리하는 해프닝이 생겼다. 이런 문화 차이, 언어 차이를 없애는 게 힘들었다. 그나마 영어 이메일이 도움이 됐다. 60여 군데 흩어져 있는 직원들이 하나가 되더라. 각자가 다른 시스템을 통일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마침 미국 EDS에 개발자를 위한 온라인 트레이닝 코스가 있었다. 돈을 내고 이걸 들여왔다. 직원들을 전부 1~3단계로 나눠 훈련시켰다. 또 직원 중 괜찮은 사람들은 미국 EDS에 보내 배우게 했다. 보고 온 직원들이 많아지면서 미국 EDS 수준을 제대로 알게 됐다. 좋은 수준은 아니더라. 그래도 우리보다 20년 먼저 한 경험이 있으니 배울게 많았다. 미국EDS에서 배우고 온 직원들이 다른 국내 전문업체로 빠져 나가기도 했다. 이걸 막기 위해 평가 제도를 개선했고 내가 직접 지휘했다. 우리나라는 인사가 가장 보수적이다. 웬만한 변화 일으키면 큰일 나는 줄 안다. 이걸 고치려면 사장이 직접 지휘해야 한다. 새로운 평가제도와 직무 효과를 따지는 급여 체계를 도입했지만 조금 나아진 정도였다. 그래서 연구소와 사내대학원도 만들었다. 그러다 미국에 있는 대형 데이터센터를 우리도 만들자고 해 인천에 만들었다. 돈이 없으니 산업은행에 빌려서 했다. 다행히 이해해줬다. 인천에 처음으로 민간 데이터센터를 만들어 가동했는데 우리 그룹뿐 아니라 다른 그룹 사람들도 많이 배우러 왔다. 지금은 데이터센터가 많아졌다. 데이터센터 만들 때 미국의 건설 표준을 따라야 한다. 예를 들어 파워라인을 3중으로 하는 것 등이다. 이런 걸 전부 EDS에서 가져와 적용 했다. 프로세스 리엔지니어링도 했다. 시스템 통합과 시스템 공학은 새로운 시스템 만들 때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과정이다. 이런걸 당시는 국내 고객이 잘 알아주지 않고, 사회도 몰랐다. 이를 나중에 책으로 냈는데 책 제목이 '정보화시대의 경쟁전략'으로 500페이지에 달한다. 이 책을 고객과 직원들에게 주고 교육을 했다. 또 각 대학과 국방대학원에 출강하며 "시스템 통합은 이렇게 하는거다"고 강의하러 다니기도 했다."

=사회: 마지막으로 후배들이 갖춰야 할 리더십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지금은 4차산업혁명 시대다. 리더십이 과거와 달라야 할 것 같다. 4차산업혁명 시대를 맞아 후배들이 어떤 리더십를 갖춰야 할 지 이야기해달라

=이주용: 저는 ‘도전’과 ‘최선’이란 단어로 함축하고 싶다. 먹고 살기에 급급하던 1960년대 IT불모지인 한국에 컴퓨터를 도입하겠다는 내 생각에 모두들 냉소적이었지만 컴퓨터를 통해 한국의 근대화를 당길 수 있다는 신념으로 도전해 왔기에 여기까지 왔다. 인생은 한 순간, 한 순간의 연속이다. 매 순간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자는 게 내가 지금까지 걸어온 길이라고 생각한다.

=이용태: 지난 이야기 먼저 하나하겠다. 1982년에 정부가 KT 설립을 발표했다. 전화사업을 체신부에서 떼어내 민간회사로 내보낸 게 KT다. 또 디지털과 데이터 통신회사를 별도 설립한게 데이콤이다. 1982년 체신부가 나한테 데이터 통신회사를 설립하라고 요청했다. 나는 그때 벤처캐피털 800만 달러를 모아 미국에 갈 생각이였다. 돈도 이미 모았다. 정부 오퍼를 거절하기 위해 불가능한 요구를 했다. 예컨대, 정부 전산화를 몽땅 나한테 넘기는 것과, 예산을 먼저 책정하고 계약을 한 다음 전산화를 하라고 요청했다. 또 미국 방식과 완전히 다른 차세대 기술로 5년 안에 끝내 미국과 유럽보다 10년 앞서가는 시스템 만들겠다고 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라 정부가 거절할 줄 알고 나는 실리콘밸리 갈 준비를 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 조건을 대통령이 수락했다는 오명차관의 연락이 왔다. 결국 데이콤을 맡았다. 원래 데이콤 설립 목적은 디지털 통신망을 깔아 디지털 교환 서비스를 하는 거였다. 당시 내가 보기에 통신사업은 줄만 깔아 놓으면 돈이 되므로 크게 신경 쓸 일이 아니여서 나는 전적으로 행정전산망에 매달렸고,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했다. IBM과 EDS가 표준 방식인데 나는 완전히 새로운 방식, 즉 유닉스 박스를 병렬하는 방식을 선택했다. IBM은 360은 메인프레임을 쓰려면, 메인프레임을 작은 것부터 큰 것까지 구색을 갖춰야 했다. 당시 유닉스는 대학 실험실 등 일부만 쓰였고, 현장에서 대량으로는 안썼다. 그래서 전부 내 의견에 반대했다. 어떤 박사는 그 일이 되면 손가락에 장을 지진다했고, 미국 컨설팅사도 불가능하다 했다. 기술 인력도 문제였다. 데이콤에 합류한 사람들은 경험이 없는 직원들이거나 갓 대학을 졸업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엔지니어 빼간다는 소리를 듣기 싫어 다른데서 엔지니어를 안 데려왔다. 경험 없는 사람들 데려와 새로운 대형 사업에 도전했다. 상식적으로 미친 짓이었다.

이용태 전 삼보컴퓨터 회장

우리가 그 때 도입한 방식은 세계 어느 나라의 큰 프로젝트에서도 시도하지 않았던 새로운 모험이었다. 결국 이것이 성공해 우리나라 e거버먼트는 모든 선진국보다 10년 앞선 셰계 최고의 시스템이 됐고, 매 2년마다 발표하는 UN의 e거버먼트의 랭킹 1위를 계속 차지해 왔다. 최근에는 1위 자리를 덴마크에 내 준 걸로 안다. 그 때 우리가 채택한 방식은 IBM 등의 메인 프레임 대신에 꼭 같은 작은 유닉스 박스를 크기에 맞게 병렬했고 그 유닉스 박스는 국산화했다. 그리고 통신은 기존 교환기 대신 패킷 스위치(Packet Switch) 방식을, 입력은 당시 대세였던 펀치 카드나 단말기가 아닌 PC를 썼다. C언어와 관계형 데이터베이스(Relational Data Base)를 썼고, 부처별로 전산화하는 대신 전 정부를 대상으로 하나의 시스템으로 통합했다. 불가능한 일이였지만 방향을 제시하고 목표를 주니 젊은 직원들이 해내다러. 이런 경험이 있기에 나는 우리나라 젊은이들과 엄청난 우리의 저력을 믿는다. 지도자만 좋으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 이건 여담인데, 작고한 삼성전자 강진구 회장한테 들은 이야기다. 삼성이 64메가 D램을 정부에서 추천해 했는데, 강 회장이 그러더라, 64메가 D램 프로젝트 하려고 실리콘밸리와 서울에 같은 시설을 만들었는데, 미국엔지니어랑 한국엔지니어에 똑 같은 숙제를 주고 결과를 보니 한국이 먼저 했다고 하더라. 한국 사람은 저력이 대단하다."

=사회: 원로들 이야기를 듣다보면 밤 새워야 할 것 같다(웃음). 이강태 회장에 묻겠다. 1세대는 아니지만, CIO포럼 회장도 하고, 태동기에 비해 지금의 4차산업혁명 시대에는 어떤 리더십이 필요하다고 보나

=이강태: 다른 관점에서 이야기하고 싶다. 우리나라는 양극화가 심하다. 그 이유 중 하나가 자기가 듣기 좋은 소리만 들어서다. 우리가 후진국에서 선진국으로 올라온 것은 젊은 사람들이 열심히 노력하고 리더십으로 당겼기 때문이다.

이강태 CIO포럼 명예회장

그럼 앞으로는 어떻게 해야 하나? 3차산업혁명은 지식 혁명이고 4차산업혁명은 지혜 혁명이다. 지식과 지혜의 차이는 대답하는 사람이냐, 질문하는 사람이냐다. 또 자기 생각이냐, 남의 생각이냐의 차이다. 지식에서 지혜으로 넘어가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젊은이들이 역사, 문학 등 인문학적 공부를 해야 한다. 있는 것에 대한 답이 아니라 없는 것을 찾아내기 위해서는 인문학 공부가 필요하다. ICT 원로들이 젊은이들에게 코딩해라, 수학해라, 컴퓨팅 씽킹을 해라 하기보다 인문학적인 폭넓은 공부와 생각을 하라고 가이드 했으면 좋겠다. 문제핵심을 찾고 해결책을 찾는 데는 인문학 공부가 필요하다."

=사회: 여담이지만 내가 20여 년 전 경영정보학회장 할 때 당시 김영태 LG CNS 사장님이 초청해 갔는데, LG CNS는 직원 채용 때 IT사람만 뽑는게 아니라 절반 이상을 영문, 법학, 경영 등 인문학에서 뽑는다고 하더라. IT를 하나도 모르는데 뽑아요? 하니 김 사장님이 3개월 하드트레이닝 시키면 전산과 졸업생이랑 비슷해진다며, 나중에 프로젝트 할 때는 인문학 졸업생들이 퍼포먼스 가 더 좋다고 한 말이 생각난다. 김영태 원로님은 후배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나 정부에 하고 싶은 말은?

=김영태: 몇 가지 만 말하겠다. 먼저 우리나라 e-거버먼트가 2020년 UN 발표에 따르면 덴마크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다. 이걸 보면서 우리가 e거버먼트는 잘 돼 있구나 생각했다. 그러나 이걸 만든 우리나라의 큰 기업이나 전문기업이나 세계 랭킹에 든 기업은 하나도 없다. 왜 그럴까? 우리는 이상하게 잘되고 커지는 기업을 견제한다. 내가 놀란 건, 우리나라에서 시스템 통합을 제일 많이 한다는 LG CNS도 세계 랭킹에서 빠져 있다는 거다. 이걸 고쳐 나가야한다. 내가 현역에 있을 때 만든 소프트웨어진흥법에도 규제가 들어가 있는 것 같더라. 큰 기업이니 비켜라하고 사업에도 끼지 못하게 하는 건 본말이 전도된 거다. 이런 규제를 없애야한다. 어떻게 하면 우리 기업이 세계서 주도권을 가질 것이냐, 이걸 지원해야 한다. 둘째는 임베디드 등 교육과 인력에 대한 지속적인 투자다. 기술이 워낙 빠르게 변하다 보니 따라가기 힘들다. 내가 재작년에 MIT의 통신 교육을 6주간 받아봤다. 해보고 느낀 건 AI를 건성으로 공부해서는 안된다는 거였다. 그러면 AI 학원이 있어야 한다. 이런 교육에 계속 투자를 해줘야 한다. 임베디드 소프트웨어도 크게 시장이 열리고 있다. 전화기부터 시작해 집에서 쓰는 냉장고까지 전부 들어간다. 그럼 이쪽을 제대로 가르치는 교육 기관이 있어야한다. 셋째, 적정 가격 보장이다. 적정한 가격을 어떻게 정하나? 성과에 의해 쉐어링하자고 평생 이야기했다. 그런데는 아직도 안 된다. 특히 헤드카운트로 원가 따지면 안 된다. 이런 제도에서는 산업이 커 나갈 수 없다. 우리나라 사람은 하면 해낸다. 정보화가 일본보다 10년 뒤졌는데 지금 e거버먼트는 우리가 일본을 추월했다. 우리가 열심히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글로벌 기업이 없는 건 유감이고 아쉽다. 우리나라에 가장 뛰어난 SI회사가 매출이 10조원이 넘지만 미국 최대 시스템 통합업체와 비교하면 10분의 1도 안 된다. 카카오와 네이버도 최고 잘하지만 이 회사 역시 페이스북에 비하면 시가총액이 훨씬 못 미친다. 왜 이렇게 작게 만드나? 요즘 세상에 자기나라만 서비스 하는 곳이 없지 않나. 전 세계에 서비스하게 지원해줘야 한다. 그러면 자연히 인력도 길러지고 나라도 좋아질 것 같다."

=이용태: 우리가 1980년대에 세계 최고의 e거버먼트를 만들었다는 것을 나는 “두더지기 하늘을 날았다”고 말하고 싶다. 기술도, 경험도, 인력도 없는 상태에서 세계 최고를 만든 이유는 두 가지다. 미래를 내다보고 모험을 무릅쓰고 방향을 제시하는 리더와 주어진 과제가 아무리 어렵더라고 끝내고야 마는 능력과 의지가 있는 청년들이다. 이 두 조건을 검토해 보자. 첫째, 리더는 정부에서 과감히 사업을 창출하고 실패를 수용할 용의만 있으면 나올 수 있을 것이다. 둘째, 청년들은 1980년대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IT기술자들이 있다. 미래교통 시스템, 의료 시스템 등 지금은 1980년대에 비해 할 수 있는 것이 너무나 많다.

=이강태: 후배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정보기술에 대한 공부도 중요하지만 먼저 인문학에 대한 공부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정보기술에서는 발전방향을 예측하는 것이 중요한데, 이러한 예측은 과거 인간들이 살아온 무늬를 통해 변화의 지혜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첨단 정보기술은 현재 유행하고 있는 일시적인 도구에 불과하기 때문에 곧 구닥다리가 된다. 첨단 정보기술 자체를 따라가려고 하지 말고, 스스로 첨단 정보기술을 구상하고 만들어 볼 생각을 하는 게 중요하다. 그리고 정부에 하고 싶은 말은, 원로들에게 공로상을 준 것은 고마운 일이지만 너무 빈약하다는 것이다. 80대 후반의 전설적인 원로들에게 장관 이름의 표창장과 홍삼 한 통 주는 것은 제 1회 특별공로상이라고 하기에는 이름과 안 어울린다. 이 분들에게 공적에 걸 맞는 합당한 예우를 해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분들을 가칭 국가 정보기술 원로자문회의라든지 하는 상설기구에 모셔 중요한 의사결정시 자문을 받도록 하면 젊은 교수보다는 백배 도움이 될 것 같다."

=사회: 오늘 원로들 말씀 잘 들었다. 정진섭 한국정보산업연합회 회장도 마지막으로 한마디 말해 달라.

=정진섭: 선배님들 뵙고 이야기 들으면서 많은 걸 생각했다. 먼저 IT업계 1세대, 2세대, 3세대를 구분해봤다. 1세대는 대학교에서 공부한 배경이 ICT가 아닌 세대로, 없는 것에서 새로운 걸 만들어낸 세대다. 이 기준에 따르면 다른 원로들보다 나이가 어리지만 이강태 회장은 1세대다. 나는 대학에서 펀치카드를 날랐다. 컴퓨터를 배웠다. 그래서 2세대다. 2세대가 본 1세대는 어떤가? 정말 많은 일을 했다. 3세대가 모를 것 같아 무슨 일을 했는지 생각해봤다. 처음에는 운이 좋다고 했지만 나중에는 혜안이라고 생각했다. 나열해 보겠다. 먼저 일본이 하는 거 보고 우리도 통신을 깔았는데, 엑사5로 깔다가 치우고 광통신으로 했다. 그래서 우리가 일본보다 10년 빨랐다.

정진섭 정산연 회장

두 번째는 전화선을 활용한 데이터망이라는 과감한 결정을 어떻게 내렸을까 하는 점이다. 대단하다. 또 경영의 신이라 불리는 잭 웰치가 쓴 책에 보면 메모리 비즈니스는 위험한 비즈니스 하지마라고 했다. 하지만 우리는 성공했다. 또 퀄컴이 GSM에 밀려 CDMA 폐기 일보 직전일 때, 우리 정부와 ETRI가 과감히 배팅해 성공했다. 원자력도 그렇다. 이런 과감한 결단을 한게 1세대다. 1세대에 존경과 자부심을 갖는 한편 우리 2세대는 뭘 했나 생각해봤다. 우리는 고속 승진했다. 1세대가 판을 잘 깔아줬기 때문이다. 당시 기억나는 건 행정고시 1등이 정통부를 1순위로 지원했다는 거다. 1세대가 IT강국을 디자인했다면 2세대는 IT강국을 이뤄낸 세대다. 3세대는 대학 다닐 때 한국이 IT강국이라는 소리를 듣고 자란 세대다. 3세대는 못 먹은 2세대에 비해 좋은 거 먹고 좋은 교육을 받고 자란 세대다. 네가 최고란 소리를 듣고 자란 세대다. 처음에는 이게 잘못 됐다고 생각했는데, 몇 년 전 일본 사람을 만나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당시 일본 사람이 자식들을 튀지 마라고 교육하는 반면 한국 부모들은 자식들을 최고라도 키웠기 때문에 이들이 창의성이 뛰어나다고 하더라. 그래서 그런지 우리나라 젊은이들은 자신감이 차 있다. 우리 2세대는 페이스북보다 더 좋은 싸이월드가 있었지만 안됐다. 그 이유는 국제화 생각이 머리에 없어서다. 우리 2세대는 이게 한계다. 하지만 기술적으로는 IT강국 이뤄 열심히 일해서 IT만은 극일을 했다고 본다. 지금 3세대 만나보면 정말 똑똑하다. 3세대 벤처에 투자하겠다는 창투사들이 수백 개 있다. 그 정도로 우리 젊은이들이 열심히 잘하고 있다. 지금 자라고 있는 젊은 세대들이 하고 싶은 일을 하게 도와주는 게 우리 2세대가 할 일이라고 본다. 정부에 바라는 것은 규제를 풀어 좋은 인력이 이 업계에 모이게 했으면 한다. 어느 나라든 좋은 인력이 모여야 발전을 한다."

=사회: 긴 시간 우리나라 정보산업 역사와 우리나라가 나아갈 방향을 이야기해 줘 고맙다. 짧은 시간에 우리나라가 IT강국이 된 건, 원로들이 한국의 저력을 이야기 했는데, 더 중요한 건 그 시대를 앞서간 여기 4명의 갓 파더(God Father)가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네 명의 초기 파운더들이 거칠고 힘들고 불모지였던 초창기 IT에 과감히 배팅해 지금의 젊은이들과 공무원들이 매우 좋은 환경에서 일하고 정책을 수립할 수 있게 됐다. 다시 한 번 갓 파더 네 분에게 감사드린다.

사회를 맡은 오재인 단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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