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위터와 소통 강박증

1. 신종 전염병, 소통
경쟁이 배타적인 비교욕구로 변질된 사회, 그러니까 '강남 살아? 아파트 몇 평임? 대학은 서울서 나왔음? 연봉 얼마임?' 따위로 예시할 수 있는 더 없이 천박하게 구질구질한 사회에서 허영과 과시욕은 이제 미덕이다. 그 심리적인 욕구는, 그것이 표출되는 풍경과 빛깔이 조금씩 다르더라도, 대한민국 중생 다수에게 공통이다. 인간 그 자체에 대한 존엄,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관계에 대한 성찰, 그것이 사회화되어 표출된 형식인 공동체적 규범과 도덕이 거의 그 형체를 알아 볼 수 없을 만큼 증발해버린 사회, 그러니까 '쥐코'로 상징되는 대한민국 말이다, 이 신나는 별천지에서 때 아닌 전염병이 창궐한다. 소통이라고 '불리는' 전염병이다. 그러니까 이쯤 되면 우리는 웃을 수도 없고, 울 수도 없는 형국이다.

2. 사이비 종교화되는 트위터
웃기는 일이다. 배타적 비교 강박증의 사회에서 이제 드디어 '소통'까지 강박이 된다. 강박이 된 소통은 트위터에 대한 과도한 경배를 불러 오고, 그 과대포장은 팔로워에 대한 과시적인 집착을 불러 오고, 또 그 집착은 "소통하려면 맞팔해!"라는 기상천외한 '주장'을 불러 온다. 이 모든 게 그야말로 병맛 삼종세트라고 할 수 있겠는데, 이쯤되면 트위터 예찬론을 그저 소박한 상식으로나마 비판적으로 돌아보는 일이 필요하지 않나 싶다.

시스템은 이미 어느 정도는 결정된 철학/경향을 내재하고 있다(네이버라는 시스템을 떠올려 보시라). 그 시스템 얼개들과 부딪히며 그것을 '실질적으로' 운동하게 하는 건, 그 앙상한 공간에 '빛깔과 풍경'을, 피와 살을 만들어내는 건 물론 사람이다. 양자는 서로에게 작용하고, 침투한다. 나는 트위터에 대해 대체적으로 호감을 갖고 있기는 하지만, 현재의 트위터는 그 시스템이 예정한 효용의 최대치를 훨씬 넘어 제어불능으로 폭주하고 있는 건 아닌가 의심된다. 풀어서 말하면, 트위터는 이제 '소통의 도구'가 아니라 '(일방적인) 과시적 소비 도구'로 변질되고 있다, 고 나는 느낀다. 왜 그렇게 느끼는지 간단히 써본다.

3. 산수 문제
이건 정말 산수 문제다. 간단히 풀어보자.

문제1.
ㄱ. 내가 읽는 트위터(이하 '팔로잉')가 100.
ㄴ. 나를 읽는 트위터(이하 '팔로워')가 1000.  
ㄷ. 그러므로 나는 10% 소통. (여기서 팔로잉은 팔로워 중에서 선택했다고 치자. 흔히 '맞팔')

문제2.
ㄱ. 팔로잉 1만.
ㄴ. 팔로워 1만.
ㄷ. 그러므로 나는 100% 소통.

문제3.
ㄱ. 팔로잉 1000.
ㄴ. 팔로워 100.
ㄷ. 그러므로 나는 10% 소통.

물론 이 문제들은 다 가짜 문제들이다.
만명의 팔로잉/팔로워가 있든, 단 열명의 팔로잉/팔로워가 있든 중요한 건 그 숫자가 아니다. 내가 '소통의 흔적'들이나마 체험할 수 있는 조건은 팔로워/팔로잉 숫자 혹은 맞팔 비율이 아니라 내가 지불할 수 있는 '시간과 관심'이다. 이건 정말 너무도 자명하지 않나? 내가 투자할 수 있는 시간이 1시간이고, 그 시간 동안 내가 포용할 수 있는 '말들의 부피'가 10이라면 그 10이라는 한계 속에서만 나는 누군가와 '소통' 비스무리라도 하고 있을 뿐이다. 그렇지 않나? 맞팔이 1만명이라서 나는 1만명이랑 소통하고 있는거야? 개뿔.

아무리 스마트폰이 진화하고, 트위터에 대한 열정이 남다르다고 해도 그 시간과 관심은 물리적인 한계치와 심리적인 한계치를 갖는다. 어떤 학자가 연구했다고 하는데 그 숫자는, 가령 트위터와 같은 상호 관심과 대화의 소통기제라면, 100명을 넘을 수 없다고 하더라. 그러니까 나머지는 '허영의 숫자'이지 무슨 '소통을 이야기해주는 숫자'가 전혀 아니다.

4. 트위터에서의 PR과 소통
단 한번도 PR(public relations)을 '홍보'(publicity)라고 번역하거나 부른 적 없다는 PR전문가 아거는 PR을 '대공중관계'로 순수하게 직역해서 표현한다. PR이 어느 정도는 목적성을 갖고, 잠재적 다수 독자를 염두에 둔다고 가정한다면, 트위터는 콘텐츠 소비를 매개/필터링/유통하는 역할을 할 수는 있어도 그 자체로 무슨 대단한 '소통을 불러 일으키는' 콘텐츠 생산 매체로서의 성격을 갖고 있다고 보기는 힘들다. 즉 트위터는 '다른 공간'에서 생산한 제품(주로 '언어상품')을 매개해주는 임시 정류장(마치 도서관 앞에서 친구들과 수다 떠는 벤치들처럼)으로서 그 가능성이 주목되고 있는거지, 그 자체로 '콘텐츠 생산의 진지'는 전혀 아니라는 말이다(그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게 아니라 현실적인 모습이 그렇다는 말이다).

트위터러가 기자라면 자사의 기사, 블로거라면 포스트, 정치인이라면 오프라인 영향력에 기반한 이미지 제고, 기업 PR 담당자라면 상품 판매 촉진 등을 강화시키려는 목적을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갖는다. 이건 지극히 자연스럽고, 이에 대해 별다른 부정적 편견도 나에겐 없다. 즉, '다수 잠재 독자(소비자/유권자)'들에게 자신의 영향력, 이미지 제고 수단으로 트위터를 '어느 정도는 합리적으로 수단화'할 수 있는 가능성이 물론 존재하고, 그 방법론은 좀더 세련되게, 그리고 무엇보다 '인간적으로' 진화되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물론 이들중 상당수는 "입으로는 '사람과의 관계'를 이야기하고, 머리로는 아직도 '머리수'에만 집착해 있"(아거)는 것 같지만.

이런 (상대적) 소수가 아닌 절대 다수 트위터러에게 트위터에서의 소통이란 건 뭔가? 소통이라는 말의 사전적인 의미가 중요한 게 아니라, 우리가 그 '소통'이라는 말을 꺼내면서 바라는 그 구체적인 풍경과 빛깔, 그 향기가 중요하다. 대부분의 우리가 원하는 건 도대체 뭔가? 

ㄱ. 내 말 좀 들어줘.
ㄴ. 내가 소개하는 좋은 글 좀 읽어줘.
ㄷ. 그냥 사소한 농담이라도 서로 건네면 그것도 나쁘진 않겠네.
ㄹ. 어떤 나쁜 놈, 나쁜 행동에 대해선 우리도 좀 자판 두드리며 잠시나마 함께 분노해보자구 (혹은 그 반대).

대부분 이 범위를 크게 벗어나지 않으리라 본다. 그 뿐이다. 아니 이것만으로도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기는 하다. 문제는 이런 의미들이 공유될 수 있는 가능성, 그 대화가 서로에게 존재감을 일으킬 수 있는 부피, 그리고 그 부피에서 얻을 수 있는 실질적인 소통의 '질량'이다. 지극히 제한적이라고 생각한다. 이건 트위터 시스템에 내재된 문제면서, 그 '이미 있는' 시스템 메카니즘에 영향을 행사하는 '행위 요소(사용자들의 문화)'를 고려한다면 아주 결정된 문제에 가깝다. 그리고 미래는 더욱 더 암울할 것으로 나는 생각하는 편이다. 특히 우리나라 특유의 문화적 구조, 그 경향(배타적 비교 질투 강박증)을 생각하면 더 그렇다.

소통을 나라는 주체와 상대방이라는 주체 간 실질적인 '대화'와 '교감', 그리고 '상호 작용'이라고 소박하게 규정한다면, 트위터를 통해 '대량으로' 소통한다고 말하는 건, 그러니까 극소수의 정치인, 연예인, 기업 PR 담당자들처럼 말이다, 뭐랄까 넌센스에 가깝다고 나는 생각하는 편이다. 우리들 대부분은 그저 아주 적은 수의 친구들과 소통 비슷한 '무늬'나마 서로 나눠 가질 수 있을 뿐이다. 

5. 자명한 것 : 소통은 숫자로 오지 않고, 진실한 대화에서 온다.
누군가에게 진심을 다하고, 그 목소리를 주의 깊게 경청하며, 서로 꿈꾸는 풍경을 함께 나눈다면, 소통은 오지 말라고 해도 온다. 소통이라는 건 그저 그런 토양들 속에서 저절로 열매 맺고, 꽃 핀다. 우리가 아무리 요란법석을 떨며 '맞팔하세요!' '맞팔하지 않으면 언팔합니다!!'를 외쳐도, 그리고 늘어 나는 '팔로워' 숫자를 보며 흐뭇해하더라도, 우리에게 진심이 없다면, 우리에게 그 진심을 표현할 수 있는 열정이 없다면, 그러니까 우리에게 마음도 없고, 마음이 있더라도 그 마음을 실현시킬 열정이 없다면, 그리고 무엇보다도 잔혹하게, 그 열정이 피어날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트위터에서 떠드는 그 대단한 '소통'이라는 건 그저 강박적인 숫자들로 박제화된 차가운 환상일 뿐이다.


추.
1. 그래도 꽤 트위터를 해왔던 경험칙으로 말하면, 팔로잉이 세자리 수를 넘어가면, 네자리 수 이상은 뭐 불가사의할 뿐이고, 그 숫자는 아무런 의미도 갖지 않는 숫자일 확률이 대단히 높다고 본다. 나는 내가 경청할 수 있고, 내 목소리를 경청해주며 또 가끔이나마 서로 가벼운 정담이나마 나눌 수 있는 열 명이 중요하지, 맞팔 '선물' 강요하며 허영의 숫자를 채워줄 '맞팔 프렌즈'는, 미안하다, 노땡큐다.  

2. 왜 맞팔하지 않느냐며 김주하를 비난한 트위터러들을 다시 점잖게 비판한 어떤 글에 있는 마지막 문장은 좀 갸우뚱하다. "달라이 라마와 김주하"(한겨레 디지털미디어본부-이런게 있나?-김외현의 글) 마지막 문장은 이렇다.  "... 소통에선, 얼굴을 맞대지 않는 한 애초부터 모든 게 걸림돌이다." ... 솔직히 얼굴이야말로 가장 큰 소통의 걸림돌이다. 슬프지만 진실.

3. 박근혜가 트위터를 통해 '본격적으로 소통정치'를 개시한다고 한다. 정치인들이 트위터를 자신의 일방적인 홍보 도구로, 좀더 기대하자면 좀더 친근하고 실존적인 울림이 남는 PR 매개로 활용하는 건 환영할 만한 일이지만, 보도자료를 설레발 치며 "소통 정치" 운운하는 기성언론들의 행태에는 쓴 웃음만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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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생활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진짜 소통을 원하고 있는데도 본체만체 들은체 만체 계속 겉돌고만 있다. 그러면서 정작 초대받지 않은 트위터같은 공간에는 어떻게든 끼어보겠다고 머리를 들이민다. 나 소통하러 왔으니 내 예기좀 들어달라고 계속 말을 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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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 트위터를 만든 사람들은 사용자들이 방구석에 쳐박혀 앉아 팔로우잉과 팔로워를 쳐다보면서 이처럼 아주 쓸데없는 일에 신경을 곤두세울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트위터가 단기간에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예측가능하게 비합리적 인간의 선택 행위’를 예측하고 그런 비합리적인 게임을 부추기는 기능들을 개발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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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dia impression을 예로 들어보자. 뉴욕타임즈의 독자가 1백만이라고 해서, 1백만이 모두 이 기사에 노출되었을까? 백번 양보해 십만명이 봤다고 치자. 십만명중에 몇 명이나 진지하게 그 기사를 끝까지 읽었을까? 또 읽었다면 그 기사에 대해 얼마나 많은 생각을 했을까? 이런 관점에서 블로그 구독자수나 트위터 follower 숫자를 바탕으로 PR의 효과를 측정하는 것이 얼마나 문제인가를 알 수 있다. (...) 입으로는 ‘사람과의 관계’를 이야기하고 머리는 아직도 ‘머리수’에만 집착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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