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결적 블로깅 : 도장깨기 신화

'인터넷 논객'으로 대표되는 우리시대의 '도장깨기' 신화는 '미야모토 무사시'류의 신화적 관극틀 안에 여전히 존재하는 것 같다.  그 '논객'들은 학위가 있는가, 교수인가, 중앙일간지에 기고하는가, 방송에 출연하는가, 책을 냈는가 따위의 세속적이며, 과시적인 표지를 은연중에 드러낸다. 일종의 외교술인 셈이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대단히 유치하고, 또 실질적으로 위험한 표지들이다. 이것은 굳이 증명할 필요가 없을만큼 자명하다. 지난 황우석 파동은 지식으로 치장된, 그리고 제도적인 조력을 받는 '구라'가 국가경쟁력이니 애국주의와 결합할 때 발생할 수 있는 총체적인 혼란과 아수라장을 보여줬다. 이것은 자기 성찰 없는 지식이 갖는 파괴적인 속성과 야만을 여지없이 드러낸다.

블로깅이 갖는 민주적인 속성, 그 가운데 내가 가장 높게 평가하는 것은 '권위 저항적'인 속성이다. 그것은 달리 말하면, 서로 다른 다양성의 목소리들이 수평적으로 대화함으로써 생겨나는 생명력, 그 가능성이다.  그것은 쉽게 말해 '실수를 통해서 성장하는 모델'이지, '실수를 통해서 붕괴하는 모델'은 아니다. 학위가 있는지, 기성언론에서 얼마나 노출도를 갖는지, 히트한 책을 냈는지 여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저 블로깅의 과정에서 만들어내는 대화의 실질적인 풍경들이 얼마나 의미있는 것인가, 아닌가가 중요하다. 즉 얼마나 많은 독자들에게 실존적인 울림을 주는가, 그 울림이 얼마나 지속적인 대화의 풍경 속에서 자랄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이 중요하다.

레오포드의 글을 읽다가 거기에 인용된 박권일의 글을 읽었다. 박권일이 블로그를 바라보는 방식은 대단히 아이러니한데, 왜냐하면 기본적으로 대결적인 인식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면서(일종의 도장깨기 신화, 이 신화 속에서 블로거 혹은 논객은 일종의 무사시류의 '사무라이'가 된다), 또 말미에서는 이 도장깨기 신화 속에 잠재된 '권위저항적인 속성'을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어 부분에는 찬동하지만, 그 과정을 바라보는 방식은 너무 위계적이고, 너무 대결적이다. 그런 까닭에 나는 박권일이 세운 전제는 대단히 위험한 전제라고 생각한다.

블로깅을 통해서 "자아가 붕괴하는 모습이 생중계"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아가 견딜 수 있는 성찰을 이끌어내는 상처들이, 그리고 그 상처들을 극복해가는 자아의 성장이 생중계된다고 봐야한다. 누구나 실수할 수 있고, 또 누구나 잘못할 수 있지만, 그것으로 '자아가 붕괴'되는 것은 전혀 아니다. 블로깅은 도장깨기가 아니며, 블로거는 미야모토 무사시가 아니다.

이런 대결적인 블로깅의 전제에는 앞서 이야기한 세속적이며, 과시적인 표지에 대한 향수가 자리한다. 이런 퇴폐적인 향수 속에서는 블로깅이 그저 대화 시스템이며, 그 대화시스템이 갖는 유희적인 속성, 실존적인 속성, 수평적인 속성을 읽어내지 못한다. 혹은 그 가능성을 적극적으로 넉넉하게 수용하지 못하고 너무 진지해진다.

블로깅은 그저 실수투성이의 대화이고, 그 대화가 논쟁의 형식인 경우에, 그 논쟁으로 인해 잠시 쪽팔릴 수는 있겠으나, 그것으로 자아가 붕괴된다면 원래 그 자아는 그 정도의 자아였을 뿐이다. 그저 블로깅을 통해 자신의 실수를 발견할 수 있는 '기회'을 갖게될 뿐이다. 궁극적으론 다름을 통해 좀더 고양된 인식의 지평을 확보할 수 있는 내적 성찰의 기회를 갖는 삶의 자연스러운 한 과정일 뿐이다. 논쟁을 통해 '자아가 붕괴'된다는 둥의 호들갑을 떨 일은 전혀 아니다. 한 광기어린 철인이 이야기한 것처럼 위대한 정신은 숭배받기 보다는 비판받기를 원한다. 그 비판을 통해 자아는, 정신은 자랄 수 있는 기회를 가질 뿐이다. 블로깅이 무슨 싸구려 놀이감으로 폄하되는 것도 이상하지만, 무슨 자아의 붕괴를 이야기할 정도로 괜한 신화적 관극틀을 통해 심각해질 필요도 전혀 없다.


* 발아점
레오포드의 글에 인용된 박권일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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